설 명절 부산에 내려가는 계획을 세우다 딸이 부산과 가까운 대마도 가보고 싶다하여,
이참에 우리도 같이 가자, 가족 여행이 되어 버렸다.
대마도 북쪽 히타카츠까지는 1시간 10분
남쪽 이즈하라까지는 2시간 10분이면
도착하는 정말 가까운 곳이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지 역할을 해온 이유로
곳곳에 우리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어릴때 고향 바다에서 맑은 날 대마도가 보였는데
그 섬에 직접 가서 우리 땅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 대마도 역사 여행 : 2월 1일 ~ 2일
▼ 2월 1일 < 08 : 30 > 부산국제여객터미날에서 우리를 책임질 가이드와 만나고
▼ < 11 : 20 > 포근한 날씨에 바다도 잔잔해 오는 길이 순탄했다.2시간 10분만에 도착한 이즈하라 모습
▼ 첫째날은 걸어서 한국의 흔적을 찾아가는 역사 여행이다. 가이드님의 해박한 지식과 강의에 나는 넋을 잃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이즈하라 항구 주차장의 경차. 일본은 경차 비중이 40% 이상 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 시골 마을인데도 참 깨끗하다는 인상은 나만 받았나!
▼ 여행객들 100% 한국 사람이다.
▼ < 12 : 36 > 오늘 첫 방문지 수선사에 가기전 역사 강의 시간 열변을 토하는 언니.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 운동을 전개를 촉구하고 전라도 땅에서 직접 의병을 모아 투쟁중 이듬 해 일본 관헌에 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일본의 곡기을 거부하다 순국하였고 그의 유해가 부산으로 가기 전 하루 여기 수선사에 모셨다고 한다. 수선사는 백제시대 비구니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여기에 유해를 모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순국비 건립을 추진했고 현지 주민들의 찬반투표를 거쳐 1986년 이 자리에 순국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여기는 신사가 아니고 절이다. 일본에서는 절이 주택지에 가까이 있는경우가 많고 절에 유골을 모신 묘지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 휴지 조각 하나 없는 시내 거리
▼ 일본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 처음에는 한국을 싫어하는 주인장의 횡포라 생각했는데 술먹고 행패부리는 한국인들을 정중히 거절하는 안내판이라네요. 어딜가나 몸가짐 똑바로 해야하는데 많이 아쉽네요.
▼ 술집이 모여 있는 뒷골목이라는데 밤에 바가지 많이 쓴다고 합니다.
▼ 이즈하라 시내를 관통하여 바닷물이 오르고 내리는 하천처럼 보이는 구간입니다
▼ < 13 : 01 > 점심은 간단한 도시락입니다.
▼ 골목길을 지나 이즈하라 시청건물있는 곳까지 왔다.
▼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있는 대마도역사민속 자료관에 도착
▼ < 13 : 45 > 조선통신사는 1600년경부터 약 2백년동안 12차례 조선과 일본의 선린우호를 위해 파견된 외교 사절단으로 그 규모는 5백명을 넘을 때도 있었고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전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다. 일본 열도에 들어가기전 대마도에 머물며 사절단을 정비하고 휴식도 취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 < 14 : 37 > 이왕가(李王家)·종백작가(宗伯爵家) 어결혼봉축기념비(御結婚奉祝紀念碑).고종의 딸 덕혜옹주(德惠翁主)와 대마도주의 후예인 소우다케 유키(宗武志) 백작과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이다. 우리로 보면 치욕의 기념비이자 국권의 쇠퇴가 가져온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양귀인(梁貴人) 사이에 태어났다.환갑날 태어난 딸이라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은 덕혜옹주를 근대교육이라는 미명아래 강제로 끌고가 일본식 교육을 받게했고 소우다케 유키와 결혼시켰으나 유복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정신병을 앓았다. 또 딸 마사에(正惠)마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953년 남편과 이혼한 덕혜옹주는 황녀로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1989년 4월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이상 가이드 설명 요약입니다.
▼ 사무라이 집이란다.
▼ < 14 : 55 > 팔번궁신사. 신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도리이(鳥居). 도리이는 새 모양으로 신의 세계와 가깝게 나는 새를 형상화하여 불경한 곳(일반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의 경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 < 16 : 01 > 일본돈 5천엔에 나오는 여류 소설가 이치요가 사모했던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를 문학관으로 복원했다
▼ 문학관을 나오면 사무라이 주택들이 모여있는 나까무라 지구.돌담은 대형 화재 발생하여 마을이 전소하자 마을을 재정비하며 방화담으로 쌓았다고 한다.
▼시내 다니다 우리와 좀 다른 모습-자판기가 엄청 많고 주택가에 단정하게 주차된 경차
▼ < 17 : 48 >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나고 한국 사람 어디가나 구워야 한다
▼ 2월 2일 < 07 : 25 > 숙소에서 바라본 이즈하라 시내 모습
▼ 주택가 안에서도 신사는 쉽게 볼수 있다.
▼ 은행이 십팔은행이란다.
▼ < 08 : 26 > 아침밥 먹고 도착한 곳은 카마자카 전망대. 안개가 자욱하여 바다는 보이지 않고 가이드님이 아침 운동하자고 한다. 맨손 체조 열심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여기도 전쟁의 흔적이 많다.
▼ < 10 : 07 > 만제키 다리를 지나간다. 러일전쟁을 대비하여 원래 하나인 대마도를 1900년부터 중간에 운하를 파서 해협을 만들었단다. 1905년 대마도해전에서 일방적 승리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진행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따라서 이 해협은 우리 근대사의 한부분이 될수밖에 없다고 본다.
▼ < 10 : 36 > 에보시타께 전망대 - 대마도에서 360도 조망이 가능한 곳으로 리아스식 해안으로 섬들이 늘어선 아소만의 절경을 감상 할수 있는 곳이다.
▼ 아래 주차장에 내려오니 붕어빵이 맛있어 보이기에 먹어보니 찹쌀모찌 맛이다.
▼ < 11 : 05 > 와타즈미 신사 - 후문 쪽에서 들어 왔는데, 삼나무 및 편백나무 숲의 신선한 공기가 너무 좋았다. 신사 전설 얘기는 별 재미 없고, 바다에서 부터 올라온 도리이가 신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 < 12 : 46 > 와타즈미 신사에서 사진 몇장 찍고 버스에서 1시간 반정도 자고 나니 히다카츠 항국 부근을 지나 한국이 보인다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부산은 보이지 않고 멋진 바다 풍경이 우리를 반긴다.
▼ 한국전망대 앞에 조선 역관사 위령비-1703년 음력 2월 5일 108명의 역관사 및 일본인 4명이 탄 배는 아침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으나 조난 당하여 전원 사항했다. 이를 기리기 위한 비가 후세가 세워져 이를을 기억하고 있다.
▼ < 13 : 11 > 오늘 점심은 히타카츠항 부근 식당에서 우동으로 점심
▼ < 13 : 43 > 우리가 타고 다닌 버스. 점심 먹고 나니 우리를 온천으로 안내해 준다. 오랜만에 온천물에 몸 담그니 피로가 싹 가신다.
▼ < 15 : 10 > 온천을 마치고 가벼운 몸으로 바로 옆 해수욕장으로 직행. 일본 100대 해수욕장에 선정되었다는 미우라 해변. 자그마한 해변이 한국인들로 가득찼다.
▼ < 16 : 30 > 이제 돌아가자. 히타카츠항에 우리가 타고 갈배가 도착했다. 49.5Km에 1시간 10분이다. 서울로 운전해 가야 할 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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