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산의 마법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여러 산행기를 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성문 종주를 하고 있었다.
북한산성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멋진 산행으로 보여
이미 오래 전 완주한 친구의 사전 설명을 듣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오후에 비가 예보 되어 있어 일찍 시작하면 되겠지 했는데 마지막 하산길은 우중 산행이 되었다.
북한산성에는 13개의 성문이 현존하는데 문루가 있는 6개의 문과 비상시 활용되었던 7개의 암문이 있다.
지금은 소실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수문을 포함해 14개 성문이라고도 한다.
14.6Km를 휴식 1시간 포함, 8시간 20분 걸려 마무리했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타 <07 :11> → ①대서문<07 :26 - 1.2Km> → ②중성문<08:00 - 2.7Km> → 국녕사<08:28 - 3.7Km> → ③가사당암문<08:51 - 4.0Km> → 용출봉<09:13 - 4.3Km> → 용혈봉<09:30 - 4.6Km> → 증취봉<09:43 - 4.8Km> → ④부왕동암문<09:54 - 5.1Km> → 나월봉 우회<10:22 - 5.5Km> → 나한봉<10:34 - 5.8Km> → 715봉<10:49 - 6.0Km> → ⑤청수동암문<10:53 - 6.1Km> → 문수봉<11:04 - 6.3Km> → ⑥대남문<11:09 - 6.5Km> → ⑦대성문 점심<11:16 - 6.8Km> → ⑧보국문<11:55 - 7.4Km> → ⑨대동문<12:09 - 8.1Km> → ⑩용암문<12:39 - 9.7Km> → ⑪백운봉암문<13:23 - 10.8Km> → ⑫북문<14:23 - 12.3Km> → 원효봉<14:30 - 12.5Km> → ⑬서암문<15:06 - 13.5Km> → ⑭ 수문지<소나기로 생략함> → 북한산성탐방지원센타<15:30 - 14.6Km> ===== 트랭글 기준
북한산성 :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 다음 문화유산에서
▼ < 07 : 12 > 새벽밥 먹고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타 도착하여 얼음물과 김밥을 챙기고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원점 회귀 산행이라 차를 가지고 왔다.
▼ 3월초 친구가 나를 의상능선으로 인도했던 곳이다. 그날의 힘들었던 기억과 정상에서의 희열의 순간이 동시에 떠오른다.
▼ < 07 : 31 > ① 대서문.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걸어 순식간에 도착한다.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16곳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 1712년(숙종38)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때,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에 마을이 있었을 당시엔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성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문루의 형식은 우진각 지붕으로 문루의 일반적인 지붕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영 건물이으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강회로 마감하였다. 누각에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준다. 문루의 배수시설로 용머리 모양의 누혈(漏穴 : 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을 성문 앞뒤로 두었다. 성 밖을 바라보는 용은 입을 벌려 누혈의 구실을 제대로하게 하였느나,성문 안쪽에 있는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장식용으로 설치 했음을 알 수 있다. 문루 정면에는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북한산성의 대문 6곳 모두에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여장이 올려져 있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 대문3곳을 맡아서 수비 · 관리하였던 군부대는 어영청 유영이었다]☜ 현지 안내 설명서
▼성 안쪽에서 본 대서문
▼ 의상능선의 시작인 의상봉이 보인다.
▼ 무량사
▼ < 07 : 43 > 자연 생태 보전을 위해 이주 시킨 북한동 마을에 도착.
▼ 오늘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원효봉이 바로 눈 앞에 있다.
▼ 중성문으로 찾아 대남문으로 가는 길을 혼자 조용히 걷는다. 이른 아침 계곡의 고요함과 편안함이 너무 좋다.
▼ 주변 절에 생필품을 져 나르는 할아버지가 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신다. 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기도 드립니다
▼ < 07 : 57 > 법용사 앞을 지나 직진이다.
▼ < 08 : 04 > ② 중성문. 시작은 너무 편안한 길이다.
[북한상의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계곡에 쌓은 중성(重城)에 설치된 성문이다.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었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차단성인 중성을 쌓았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의 내성(內城)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 행궁·중흥사·상창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중성문의 수비를 담당했던 군부대는 대서문과 대남문의 수비를 맡았던 어영청 유영이었다. 현재의 중성문은 석축기단인 육축부,그 위에 올려진 문루,무지개 모양의 출입구인 홍예문을 갖춘 전형적인 대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예 양쪽에 문루의 배수 시설인 누혈이 하나씩 설치돼 있다.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걸쳤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중성문 옆의 암반에 목2.1m, 높이 1.8m 규모의 작은 암문(暗門)이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성 안에서 생긴 시신(屍身)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안간다고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렀다. 한편, 중성문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현장 안내 설명서
▼ 무너진 수문 자리
▼ 국녕사를 거쳐 의상능선으로 오르기 위해 다시 내려간다. 평소 물 흐르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라하는데 오늘 북한천은 조용하다.
▼ < 08 : 14 > 법용사 삼거리에서는 국녕사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법용사 대웅전
▼ 이제 제법 가파른 길을 가야한다. 등로에 국녕사 이정표가 많이 있다.
▼ 원효봉 · 염초봉 · 백운대. 공기중 습기가 많은지 오늘 조망은 엉망이다.
▼ < 08 : 31 > 범용사에서 약 15분 헐떡이며 올라 온 국녕사
[1711년(숫종 37)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성내의 군사 요충지에 사찰 13곳을 건립하여 산성의 수비와 성곽 관리를 맡겼다. 이런 사찰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 하는데,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어 병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성과 함께 창건된 승영사찰의 하나로 당시엔 86칸 규모였다. 사찰의 위치로 미루어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벽과, 그 중간에 위치한 가사당암문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사되었다가 근래들어 새롭게 조성됐다. 문화재로는 절로 올라가는 계곡 우측에 '漢月堂大禪師'라는 명문이 새겨진 조선 후기 양식의 사리탑이 있다] ☜ 현지 안내 설명
▼ 동양 최대의 좌불인 국녕대불
▼ 가사당암문이 있는 의상능선으로 올라가는 길도 가파르다.
▼ 자주 뒤돌아 보지만 오늘은 영 엉망이다.
▼ < 08 : 53 > ③ 가사당암문. 국녕사에서 된비알 10분 정도 오르면 도착한다.
[ 북한산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숙종 37)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 암문(暗門)중 하나로, 현재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와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가사당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친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 잡고 있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수비·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으로도 불린다] ☜ 현지 안내 설명서
▼ 성 밖에서 본 가사당암문
▼ 가상당암문을 지나니 앞에 용출봉이 우뚝 서 있다. 가파른 암릉 연속이다. 여기서 문수봉까지가 가장 힘든 구간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올라가야지
▼ 용출봉 오르다 잠시 쉬면서 뒤돌아 본 의상봉.
▼ < 09 : 19 > 용출봉에서 퍼질러 앉아 많이 쉬었다. 3월초 처음 올라 왔는데 3달만에 또 올라 왔다.
▼ 용출봉에서 본 비봉능선의 사모바위·비봉·관봉
▼ 용출봉에서 본 나월봉·나한봉·문수봉
▼ 용출봉에서 본 백운대·만경대·노적봉
▼ 기묘하게 보이는 바위 구경하며 용혈봉으로 다가간다.
▼ < 09 : 37 > 용혈봉 입성
▼ 여전히 희미하게 조망되는 삼각산
▼ < 09 : 48 > 증취봉
▼ 증취봉에서 바라본 나월봉. 칼보다 더 날카로는 날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 부왕동암문 부근의 부왕동 여장
▼ 성곽 주면 여러 곳에서 발굴및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최근 예산이 바닥인지 다 중단된 상태로 보인다.
▼ 성량지 - 성곽에 딸린 초소 건물이자 병사들의 숙소였던 성랑(城廊)이 있었던 자리
▼ < 09 : 59 > ④ 부왕동암문. 힘든 봉우리 3곳을 넘어 도착한다.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1711년(숙종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성 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쪽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와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부왕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출입구의 모양은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 형태가 아니라 외관상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蜺) 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동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부왕동암문 아래에는 원각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원각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이었는데, 부왕동암문의 실질적인 방어와 수축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부왕동암문은 원각문으로도 불린다]☜ 현지 안내 설명서
▼ 이제 나월봉을 우회하여 진행하는데 먼저 정상이 멀리 보인다.
▼ < 10 : 21 > 나월봉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금줄이 쳐져 있다. 많이 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단속을 강력히 하든지! 안전 장치 보강하여 허용 하든지! 지금은 출입금지!
▼ 사진으로 많이 보았던 나월봉에서 내려 오는 길
▼ 나월봉에서 나한봉으로 가는 길
▼ 나한봉 가다 뒤돌아 본 의상능선
▼ 뒤돌아 본 나월봉 정상.
▼ 나한봉 올라 가며 바라 본 비봉능선
▼ 나한봉 정상
▼ 나한봉 올라가다 쳐다본 715봉 올라 가는 바윗길
▼ < 10 : 41 > 발굴및 복원 공사중인 나한봉 정상.
▼ 715봉 올라가는 바윗길. 올라가며 바라보는 북한산의 절경
▼ < 10 : 52 > 715봉 정상
▼ < 10 : 56 > ⑤ 청수동 암문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1711년(숙종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 현지 안내 설명 서
▼ < 11 : 04 > 언제 와도 기분 좋은 문수봉. 여기서 내려보는 비봉능선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하다.
▼ 대남문 내려 가는 길
▼ < 11 : 13 > ⑥ 대남문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 (숙종37)에 지어졌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현지 안내 설명서
▼ 대성문 가는 길
▼ < 11 : 20 > ⑦ 대성문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37)에 지어졌다. 문의 형식과 규모는 대남문과 같다. 대성문은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등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층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문루는 소길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현지 안내 설명서
▼ 한 쪽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주말이면 자리 잡기 힘들텐데 여유가 있다. 맛나는 점심 시간.
코스가 길어 두번에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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