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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걷기/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1코스 심도역사문화길 <강화버스터미널 - 갑곶돈대> 2017. 06. 24


비는 오지 않고 매일 폭염 주의보가 내리는 6월이다.

바로 옆 중국에는 전국에 걸쳐 물 난리로 떠들썩하다는데

장마비는 저 아래에서만 조금씩 뿌리고 있다.


오늘도 소나기가 잠시 예보 되어 있지만

하늘을 보니 많이 내릴 징조는 안 보인다.


땀을 많이 흘리는 계절이라 힘든 산행은 줄이고자하여 오늘은 강화도로 간다.

강화도 나들길에 볼거리도 많고 바다를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길도 아주 좋다고 다녀 온 사람들이 추천하고 있어

우리도 이번 여름 여기서 노닐기로 한다.


★ 1코스 : 15.6Km  / 누적 : 15.6Km (트랭글 GPS)


『강화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이 1906년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찾아 강화가 품고 길러낸 자연과 땅 위의 모든 것과 연결한 길입니다.

이 길은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며 이들이 바로 강화나들길 주인입니다. 문신처럼 한반도 역사를 새기고, 화석처럼 문화를 남긴 유인도 9개, 무인도 17개로 이뤄진 수도권 제일의 청정지역인 이곳에 본섬 13개 코스 14개 구간 226.4Km, 석모도 2개 코스 26Km, 교동도 2개코스 33.2Km, 주문도 11.3Km, 볼음도 13.6Km 등 19개 코스 20개 구간 등 모두 310.5Km 나들길 코스가 있습니다』- 강화나들길 홈피에서





▼<10:30>토요일 아침이라 길이 한가하다. 강화풍물시장에 주차하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강화버스터미널


▼<10:36>버스터미널 안내소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고 지도 및 도보여권을 수령하고 출발한다. 여기서 1코스 출발 스템프를 찍어 준다.



▼나름대로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시작부터 헤매기 시작한다. 강화 읍내에는 3개코스가 엊갈리며 진행되어 더욱 찾기 힘들게 되어 있네! 스마트폰 앱을 다운 받아 확인하며 가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먼저 다녀오신 분들 후기 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나들길을 만들어 다녔던데 이해가 간다. 우리는 스마트폰 켜고 비교적 정해진 길을 찾아 걸었던 것 같다.


▼강화군청 옆 우체국을 끼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이정표를 찾지 못했다.


▼우체국을 지나 동문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강화나들길 표식이 보인다. 동문 앞이다.


▼동문 앞에 서 있는 이정목도 헷갈린다. 이정목에는 동문으로 가라고 되어 있는데 앱에는 강화성당으로 바로 가라고 되어 있고 ~~~. 먹거리를 제대로 챙기지 않아 여기 마트에서 간단히 가방에 챙긴다. 어제보다 온도는 많이 내려 갔으나 습기가 많은지 후덥지근하다.



▼동문을 지나 성공회 강화성당 가는 길



▼<11:23>성공회 강화성당 도착. 건물이 독특하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강화에서였다.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 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전 내부




▼범종도 보인다. 초기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건물이나 장식품 등을 우리와 인근한 모습으로 준비한 듯하다.





▼<11:30>성당 바로 아래에 있는 원흥궁 도착.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평은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건평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역사 공부하며 볼 만한 곳이 많이 모여 있다.


▼원흥궁에서 나오며 바라 본 강화성당



▼다음 찾아가야 할 곳은 고려궁지인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난감하다. 원흥궁공원에서 한참을 헤맨다.



▼강화초등학교를 지나


▼<11:43>고려궁지 앞에 도착한다. 입장료 내고 들어갈까 하니 사양하네!


▼여전히 이정표 찾기가 쉽지 않다. 나들길은 이제 주택가로 들어간다.



▼줄기는 접시꽃인데 꽃은 카네이션 같은데


▼여기 골목도 오래되었고 집들도 오래되었는데 골목으로 넘어지는 소나무도 오랜 세월 버티고 있다.



▼<11:55>우리가 제대로 길을 찾아 가고 있다. 명문 강화여고 정문을 지난다.


▼강화향교

『1127년(인종 5) 3월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1232년(고종 19)에 지금의 갑곶리(甲串里)로 옮겼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시 서도면(西島面)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밖의 송악산(松岳山) 옆에 복원하였다.1629년에는 강화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明倫堂)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溵)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1985년 9월 20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95년 11월 14일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제기고(祭器庫)·주방(廚房) 등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며, 1명의 전교(典校)와 수명의 장의(掌議)가 운영을 맡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제 나들길은 산으로 들어간다. 북한과 접경지역이라 스마트폰에서 지도 서비스가 제대로 안된다. 험하지 않은 산책길이다. 울창한 소나무에서 나오는 나무향이 아주 기분 좋게한다.


▼산성이 나온다. 무너졌는지 토성인지! 우리는 북문으로 향한다.



▼<12:05>성곽길 조금 걷다가 다시 숲속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길에서 헤매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후덥지근한게 땀이 제법 나고 간간히 빗방울도 떨어진다. 좀 쉬면서 요기하자. 오늘은 막걸리에 복분자를 타서~~~



▼먹고나니 힘이 난다. 숲길이 너무 잘 되어 있어 좀 지루하기까지 하네




▼<12:28>북문 진송루 도착. 여기는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오른 쪽 성곽길로 올라간다.




▼잠시 성문 밖으로 나가니 울창한 은행나무길이 이쁘게 나있다.


▼성곽으로 올라가니


▼흐린 날이어도 꽤 멀리까지 조망된다. 멀리 높은 산이 봄철 진달래로 유명한 고려산이다.





▼이제는 높은 산으로 가지 말고 이런 길만 걷자하는데!


▼양쪽에 밤나무꽃이 한창이다.



▼강화산성 북장대지. 북장대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한다.




▼<12:43>나들길은 성곽길을 벗어나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금부터는 거미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흐린날이라 그런지 나들길에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거미들이 길에다 촘촘하게 줄을 쳐 두었다.



▼<12:53>대산리 마을로 내려온다.



▼풀밭에서 무얼하나 보니 마늘을 캐고 계신다. 심어 놓고 비료도 농약도 안주고 그냥 두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대산리 큰길을 가로 질러 마을로 들어가니 역시 한가하다. 여기는 가뭄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네.


▼탐스럽게 열렸다.



▼공사중인 도로 아래는 농기계 보관 창고가 된다.


▼하나 깨 먹고 싶은데 주인이 안 보인다.


▼길에 복숭아 나무에도 주렁 주렁 달렸다.


▼풀밭에 양귀비 한 그루만 피었다.



▼오래 된 나무가 집을 지키고 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여기는 전원주택.



▼강화도도 서울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다. 아직도 펜션 공사가 여기 저기 진행되고 있네




▼산딸기는 없네


▼<13:42>지도 보니 월곳마을인데?


▼여기도 폐가


▼배고프다. 가방에 남은 먹거리 땡 처리하는 시간.




▼<13:57>강화외성 월곳돈대 도착. 원곳돈대에서 검문하던 조해루가 복원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월곳돈대로 올라가는 길. 그 안에 원미정이 자리하고 있다.


▼월곳돈대 들어가는 입구.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 두 그루 아래 자리 잡은 연미정. 흐린 날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낮아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



▼왼쪽 섬이 유도로 남북군사분계선이 지나는 곳이다. 그 넘어 북녘땅이 희미하게 보인다.


▼북쪽이 희미하다.


▼김포 문수산이 보이고 한강과 임진강 물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는 바닷길 중 하나


▼우리처럼 걷는 여행하는 사람도 있고, 단체로 역사 탐방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돈대에서 나오며 내려다 본 조해루



▼옥계마을로 해안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길 한쪽에 파이프가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농수을 공급하는 관이다.


▼요즘 철 없어진 코스모스


▼여기 오면 우리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게 실감난다. 이중으로 쳐진 철조망이 무섭기까지 하다. 옥계방죽 길이다.



▼방죽길은 이제 차도를 벗어나 농로로 들어간다. 방죽 아래 수로에는 물이 차고 넘친다.



▼ 조금 전 관으로 물을 공급하는 펌프가 보인다.


▼물이 있으면 어디나 이런 분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붕어가 많이 잡힌다는데 오늘은 영 소식이 뜸하다 하시네


▼수로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 각자 논마다 마련하는지 여러 개가 모여 있다.


▼나들길은 방죽길을 뒤로하고 논 한가운데 농로로 들어간다. 새들이 여기 저기서 날아 오르고 자리 잡아 내리고 바쁘다.




▼힘들면 쉬어가며 천천히 가자.



▼부지런한 농민은 벌써 고추를 붉게 만들었다. 풀 한 포기 안 보인다.


▼또 잠시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에 무덤이 많이 보인다.





▼노인 요양 시설이 있는 곳에서 찻길로 잠시 나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간다.




▼<15:08>다시 해안길로 나왔다.


▼<15:11>6.25참전용사기념공원에서 쉬어간다. 67년 전 오늘이다. 기억하고 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달려 온 16개 국가를 기억하는 기념목이 세워져 있다.







▼ 강화대교가 보인다. 이 길도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해운사 앞을 통과



▼강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15:29>강화대교 아래를 통과하면 바로 갑곶순교성지가 나온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 순교성지는 순교자 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앞에서 잠시 머리 숙이고 우리 갈 길을 간다.




▼옛 강화교. 지금은 상수도 관이 지나고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다리 난간에 거물이 매달려 있다. 북에서 내려 오는 폭탄이라도 잡으려고 하는지!




▼큰 길로 올라오면 성당이 보인다.



▼마니산 참성단이 있고 순교 성지가 있는 곳. 여기는 강화도


▼<15:41>강화전쟁박물관 앞에서 1코스를 마무리한다. 흐린 날 빗방물 맞으며 한가롭게 걸었다. 이 더운 여름 강화도에서 노닐까 생각 중이다. 우리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 같은 시작이었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카카오택시를 불러도 답이 없다. 버스를 타려고 큰길로 나가는데 순환버스가 오길래 손 흔드니 바로 태워준다. 강화 풍물 시장에 도착하여 순무 김치도 담고 생선도 좀 사고 마지막으로 밴뎅이와 막걸리를 차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