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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걷기/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온수공영주차장 - 가릉> 2017. 07. 12


장마가 잠시 남으로 내려간 사이 연일 폭염 주의보가 내린다.

오늘은 초복.

다들 더위를 다스리는 보양식을 즐기는데

나는 가방 챙기고 강화도로 간다.


여름 더운 날 너무 땀을 흘리는 체질이라 산에 오르는게 부담스러워 강화도 나들길에서 놀기로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땀을 더 흘리고 있다.


이왕 시작한 나들길 잘 다스리며 마무리 하고자 오늘도 강화도로 간다.

오후에 도착지에 온다고하여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발점에 도착한다.


★ 3코스 : 14.9Km  / 누적 : 86.4Km (트랭글 GPS)




▼<09:05>직접 운전하고 오면 약 45분 걸리는데 지하철 타고 검단사거리에서 700-1번 버스 환승하여 온수 공영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2시간 이상 걸렸다. 3코스 버스정류소에서 인증 스템프 찍으며 시작한다.


▼출발하자 마자 골목길 올라가는데 가정집 앞에서 공사중이라고 돌아가라고 한다. 덕분에 길상초등학교 앞으로 걸어가게된다.


▼길상초등학교 정문에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의 노래비가 서 있다. 여기 길상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인천으로 전학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수리 마을길



▼나들길 리본을 보지 못해 나들길을 벗어난 지점에서 만난 개. 자기한테 뼈를 주지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오늘 내 앞에 개가 많이 나타난다. 아하! 오늘이 복날이구나. 개를 먹지 않은지 약 10년이 지났구나! 


▼멀리 벗어나지 않아 곧 바로 나들길에 들어왔다.


▼<09:21>성공회 온수 성당 앞을 지나간다. 시작부터 길을 놓쳐 정신이 없었는지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아래 사진은 집에 돌아 오면서 다시 찾아가 남긴 사진이다.


▼<16:51>천주교 인천교구 온수성당. 네비로 온수성당 검색하여 도착했는데 사진으로 보았던 것과 다르다. 계신분이 카메라든 우리를 보더니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17:00>성공회온수성당 도착. 차를 주차하자마자 종탑이 우리를 반긴다. 초기 성당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자 이러한 형태로 세웠다.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溫水里聖堂)은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한옥 성당이다. 성당 주보 성인이 성 안드레아라서 성 안드레아 성당이라고도 한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다.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인데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다.당시 대한성공회 주교였던 조마가 주교에 의해 정면 3칸, 측면 9칸의 규모의 한옥으로 지어졌다.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다.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성당 옆의 사제관 건물은 2002년 2월 4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으로 지정되었다.』인터넷 위키백과


▼사제관


▼성안드레성당



▼2004년 신축된 성당



▼사진 몇장 더 남기고 가자







▼<09:21>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찾아 가야지


▼대로를 지나가는데 이 길에는 사람도 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맘때면 엄마는 상추와 쑥갓을 따서 멸치젖갈을 얹어 맛나게 쌈을 만들어 드셨는데. 이 맘때면 쓴맛이 더해가는 상추와 쑥갓이다.


▼지도에 보니 3코스도 산속으로 오랜 시간 들어가는데 오늘도 땀 많이 흘리겠다.


▼길상면장이 관리하는 200년 넘은 느티나무


▼분위기 좋은 시골길. 요즘 시골은 시골 같지 않다.



▼<09:25>강남중학교 주변에는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이런 분위기 너무 좋은데 날이 맑으면 더 멋진 그림이 되었을텐데


▼<09:42>길정저수지. 지도에 보니 왼쪽 제방길로 단축해서 갈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그냥 정코스로 들어 간다. 해가 없으니 뜨거움은 덜 한데 시야가 답답하다.


▼제법 큰 저수지로 최근 비가 좀 내리니 풍부해졌다.



▼여름 꽃 능소화


▼밭 작물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다. 도라지


▼고추


▼땅콩


▼참깨


▼들깨


▼<10:01>한시간 정도 걸었다. 과일 한조각하며 땀 좀 말리고 간다.


▼이 길 걸었던 사람들이 항상 남기는 사슴



▼이제는 이런 탈곡기도 골동품이 되었다.


▼야생 동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라고 설명되어 있다.


▼<10:19>이규보묘 도착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현재 묘역은 봉분의 둘레 16m, 높이는 1.8m,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묘소는 여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재실()을 복원하였다.』인터넷 사전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와 어디로 가야하나 살피니 묘소를 넘어 가라고 표시되어 있다. 의아해하며 올라가니 묘소 위쪽으로 소나무 숲 사이 리본이 보인다. 잘 자란 소나무 숲이 나를 반긴다.




▼연등국제선원 대웅전도 보인다.


▼<10:43>잠시 숲 속으로 들어 갔다가 내려오니 이쁜 건물이 보인다. 여기서 좀 쉬어가는데 펜션 주인이 나와서 편히 쉬고 가라고 힘을 주신다.




▼나들길은 건강식품제조업체 다담원 마당을 지나간다. 들어가자 마자 개 두마리가 따라 붙으며 짖는다. 다시 정문으로 되돌아 나와 안을 살피니 한 남자가 나와 개를 잡고 들어가 목줄을 채운다.오늘 개하고 자주 만나고 곤혹스런 상황이 발생한다. 개 키우시는 분들 제발 묶든지 가두어 키우세요. 순해서 안 무니 걱정 말라고 하시는데 개는 짐승입니다. 제발!



▼다담원 앞 마당


▼다담원 앞 마당을 지나 산으로 들어 가는데 여기도 개가 짖고 있다. 개조심하고 만지지 말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비가 와서 습한 조건이 맞았는지 길위에 버섯이 많이 올라와 있다.


▼리본따라 잘 걷고 있는데 네이버 지도를 보니 내가 걸어 온 길과 달리 안내하고 있다.


▼할 일이 없는지 꼼짝 않고지나가는 나를 쳐다 본다.


▼<11:07>큰길로 나온다. 부근에 군부대가 있는지 길에는 군인들이 보인다.  여기 저기서 사격하는지 요란한 소리가 계속된다.


▼군부대 앞을 지나 나들길은 인삼밭을 지나고 있다.



▼집 앞까지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여기도 개 두마리가 따라 붙는다.



▼여기는 사람들이 별로 안가는지 왕성하게 자란 풀이 내 키를 넘고 있다.





▼<11:27>산길을 한참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 쪽으로 올라가면 곤릉에 도착하게된다.


『사적 제371호. 지정면적 1,091㎡. 원덕태후는 1212년(강종 1) 왕비로 책봉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고 고종을 낳았으며 1239년(고종 26)에 별세하였다.고려는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 1270년(원종 11)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강화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였다. 원덕태후는 강화에서 별세하여 곤릉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된다.능의 봉분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붕괴되고 석조물이 파괴되어 폐허된 것을 197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 정비하였다.능에는 사성(莎城)은 없고 봉분 앞에 ‘高麗元德王后坤陵(고려원덕왕후곤릉)’이라 쓴 표석과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능 앞에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은 고려시대의 능제(陵制)이다.』위키백과


▼곤릉에서 어디로 가는지 길을 찾아도 안 보인다. 다시 내려와야하는 길이다.


▼이제 많이 익숙해지고 친해진 강화나들길 리본


▼<11:39>정자나무 아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배도 고프다. 바나나에 얼음물 한병


▼이 넘은 직접 나를 향해 짖지는 못하고 한참을 지나가고 있으니 뒤에서 따라 붙으며 짖어댄다. 오늘 이런 개새끼들이 나를 열나게 하는구나!


▼<11:52>이제 나들길은 진강산 둘레로 들어간다. 안개가 조금씩 물러나 해가 잠사 잠시 비치는데 숲속이라 뜨거움은 덜하다.



▼이 약수터는 오래전부터 말랐는지 낙엽만 가득하다.


▼진강산 아래 등산로 일부인지 아주 편하게 걷는 길이 계속된다.


▼가방 풀고 머리 감고 세수하고 앉아 쉬어간다.


▼<12:04>석릉가는 길


▼석릉 도착. 여기는 돌아 내려 가라고 안내한다.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위키백과



▼나들길은 진강산 등로와 같이 걷는다. 덥다고 산행을 중단하고 강화도로 왔는데 계속되는 산길이다. 그래도 걷기에 아주 좋은 편안한 길이라 다행이다.



▼직진하면 진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진강산 정상(?)



▼인천카톨릭 대학 뒤 울타리를 걷는데 곳곳에 조용해 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에 통제하는 문도 설치되어 있고


▼도착까지 3키로 정도 남았구나.




▼동물 모양의 바위가 길에 기어 나와 있다.


▼여기는 나무로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조금 지나 오토바이 출입금지 안내판이 보인다. 학교 주변으로 산악 오토바이가 많이 올라왔나 보다.




▼길 중앙에 당당히 자리 잡은 버섯


▼강화능내리석실분


인천기념물 제28호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1 에 있으며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석실의 크기가 남북 방향 270cm, 폭 195cm 규모로서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쌓았고 고분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의 석주(石柱)가 남아 있으며,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석실분은 널방[玄室]을 만들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진흙·숯·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 일반적이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경우는 대개 원분(圓墳) 속의 석실에 칠관(漆棺)과 화장한 재를 담은 돌널을 안치하였는데, 앞에다 석등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형태와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분묘로 추정된다. 』두산백과


▼강화능내리석실분 바로 아래 가릉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위키백과


▼3코스 종점으로 가기위해서는 더 내려가야한다. 4코스 출발점은 바로 여기 가릉인데 내려가 3코스 종점 및 4코스 출발 스템프를 찍고 올라와야한다.


▼어린이들 체험학습장인지!



▼<13:10>3코스 종점 도착. 더운 날 4시간 정도로 비교적 빨리 걸었네!  아침에 검단사거리에서 버스 기다리며 준비한 고기만두로 점심을 대신한다. 중간에 가게가 있으면 막걸리라도 한병 챙길려고 했는데 3코스에는 전혀 없었다. 얼음물 3병도 이제 반병 정도만 남았다. 4코스가 바다로 가면 물를 구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