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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걷기/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 <가릉 - 망양돈대> 2017. 07. 12


3코스 종점에 도착했는데

4코스는 다시 가릉으로 올라가야한다.


오후가 되니 안개가 조금 걷히고 해가 비추니 눈은 상쾌한데 피부는 따갑다.

이미 젖고 마르고를 반복한 웃도리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그래도 다행인 건 간간이 바람이 불어 조금의 숨통을 열어준다는 사실이다.


4코스 짧은 구간으로 들어간다.


★ 4코스 : 9.1Km / 누적 : 95.5Km (트랭글GPS)




▼<13:24>진강산 정상에 구름이 걷히고 있다. 다시 가릉으로 올라간다. 귀가 차량 4시30분까지 외포리선착장에 도착하라고 연락한다.


▼<13:30>4코스 출발점 가릉 도착. 오토바이들이 올라오는지 출입금지 표지판이 여기 저기 보인다.


▼가릉 한쪽으로 난 길이 나들길이다.



▼길에서 버섯을 많이 보게 된다. 모양은 송이버섯이네


▼갑자기 고라니가 튀어 나와 달린다. 깜짝 놀라며 셔타를 눌렀는데 벌써 저 앞에 달려가고 있다.



▼여기도 버섯


▼<13:51>이정목을 보지 못해 한참을 내려가는 알바를 했네



▼또 버섯


▼이제 나들길은 터널로 연결된다. 속으로 들어가니 잠시 시원해 진다.



▼기도원 뒷길인데 리본이 없어 어디로 갈지 한참 헤맨 구간이다.


▼<14:14>갈멜산강화금식기도원 정문 도착. 속옷을 벗어 버리며 땀도 좀 딱고



▼지도에 보니 오늘 산길은 저 앞이 마지막이다.


▼<14:23>정제두 묘에서 오늘 산길은 끝이 난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했다. 어려서 이상익에게 배웠고, 10여 세 때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겼다. 1668년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 무렵부터 공소에 빠진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689년 안산에 옮겨 살며 양명학에 더욱 몰두했으며, 이 시기에 <학변>, <존언>을 저술했다. 1709년에는 주거지를 강화도 하곡으로 옮겼고,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로 임명되었다. 』다음백과


▼정제두 묘에서 내려 오면 대로를 따라 걷는다. 바람이 제법 불어 따가운 햇살 아래서도 걸을 만하다.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다.


▼이제 나들길은 하일리로 들어 간다.



▼강화학파의 비조 하곡 정제두 선생의 얼이 서린곳 하일리



▼이쁜 정원을 지나 이제 바다가 보인다. 파란 하늘이 나왔어도 아직 공기중에 수증기가 많은지 건너편 석모도는 실루엣을 두른 듯하다.



▼진강산 정상의 구름은 이제 다 날아 갔다.


▼하일리를 벗어나 이제 건평 마을로 들어 온다. 더워서 다들 집에서 쉬고 계시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네



▼<14:52>이건창 묘 도착


『조선 말기의 학자, 관료, 문장가. 강화학파의 거두로아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이고, 당호(堂號)는 명미당(明美堂). 정종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의 후손이며, 본관은 당연히 전주 이씨. 할아버지인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이 개성 유수를 지낼 때 유수부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이 집안이 대대로 강화학파의 거두인 만큼 강화도에서 성장해 강화도에서 죽었다.조선 최연소 과거급제자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1866년 강화도 별시에서 15세의 나이로 합격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출사하지 못하고 3년간 발령 대기상태였다. 18살에 비로소 승정원 주서(7품)로 출사하여 충청우도/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884년부터 연달아 부모상을 당해 6년 간 상을 치르고 이후 한성부소윤으로 복직, 함경도 안핵사를 지냈으나 1894년 갑오경장에 반발해 고향인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고, 4년 후인 1898년 47세로 사망했다.저서로는 《명미당집 (明美堂集)》과 《당의통략(黨議通略)》등이 있다. 당의통략은 조선시대 당쟁의 발생 원인과 전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평을 받으며, 조선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나무위키



▼오늘 나들길에 올라 와 처음 만나는 가게.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려했는데 없다고 한다. 시원한 생수 한병으로 만족해야했다.


▼<15:00>건평나루 도착




▼석모도가 바로 앞이다. 이제 찻길을 따라 가면된다.



▼여기에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서 있다.


▼멀리 석모도 들어가는 다리가 보인다.



▼여기 해안도로 건설할 때 여기 돌을 이용했구나. 채석장 절벽이 아슬아슬하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훈련하는 선수들도 자주 보인다.


▼참 오랜만에 와 보네. 외포리 선착장이 이제 지척이다. 애들 어릴 때 외포리에서 차를 싣고 석모도로 들어가 한바퀴하고 보문사 절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최근 개통된 석모도 들어 가는 다리



▼<15:41>외포리 선착장 도착. 다리가 연결되었어도 배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줄서 있다. 주문도 또는 볼음도 들어가는 차량인듯. 90년대 왔을 때 정말 복잡했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정말 조용하네





▼4코스 종점은 외포리 선착장이 아니고 망양돈대라 좀 더 가야한다.



▼일자리를 잃어 버린 배. 앞에 석모도 선착장이 보인다.






▼잡자기 진도개가 보이고 돌하루방이 서 있다. 뒤에 보니 삼별초항쟁비가 서 있다. 망양돈대 올라가는 입구이다.





▼<15:59>망양돈대 도착.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망양돈대는 높이 3m, 2.5m, 둘레 120m의 원형으로 대포를 올리기 위한 포좌(砲座) 4개소와 치첩 40개소가 있고 윗부분에는 벽돌로 만든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으로 여장 또는 성첩이라고 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남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건평돈대(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8)가 있고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삼암돈대(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35)가 있다. 그 밖에 당시 망양돈대와 함께 축조된 돈대로는 택지·분오리돈대(이상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장곶·계룡·건평·건평·굴암·미루지·북일곶돈대(이상 인천광역시기념물), 망월·선수·화도·무태등대(이상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특히 해안에 위치한 화도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망양돈대에서 내려와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도착 스템프는 어디서 받는지 모르겠고 귀가 차량은 도착했다고 연락이 온다. 먼저 화장실에 가서 간단히 씻고 콜라 한병을 숨도 안 쉬고 마시고 나니 세상 부러울게 없어진다. 아침에 놓친 성당을 찾아 바로 출발한다. 오늘도 더운 날 25Km 짧지 않은 길 즐겁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