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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걷기/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 <갑곶돈대 - 초지진> 2017. 07. 01


유난히 가뭄이 심한 올해 늦은 장마가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부 지방까지 올려면 아직 며칠이 더 걸린다는 예보가 나온다.

교외로 나가면 바닥이 거북 등짝이 되어버린 저수지가 많이 보이고

한낮 태양을 보고 있는 잡초들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오늘은 비는 없고 가끔 저녁 늦게 소나기가 온다하여 아침 일찍 강화도로 달려간다.

오늘은 강화나들길 둘째날이다.


★ 2코스 : 16.5Km  / 누적 : 32.1Km (트랭글 GPS)




▼<07:59>지난 주 같이 걸었던 1코스 종점이 오늘 출발점이다. 전쟁박물관으로 들어가야 갑곶돈대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출발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래 잠시 빌려온 사진으로 갑곶돈대 탐방을 대신하고자 한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위키백과


▼<08:05>잠시 걸어 나오니 2코스 출발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고 뒤돌아 보니 갑곶돈대 성벽이 보인다.



▼뒤돌아 본 정자. 잔뜩 흐린날이라 모든게 다 흐릿하다.


▼다리를 건널려고 올라가니 갑자기 할머니가 검은 봉투를 내민다. 아침에 밭에 갔다가 오이를 따가지고 귀가 중에 나를 만나 오이를 건내주신다. 집이 어디냐 여쭈니 저 앞에 추어탕 집이라고 하신다. 기회되면 먹으로 가야지


▼뒤돌아 보니 옛 강화대교가 보이고 그 뒤로 김포 문수산이 희미하게 비친다.



▼몽고 침략때부터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여기 해안가는 여러 전쟁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는 전장이었다. 그래서 여기 길을 호국돈대길이라 칭하고 특히 6월에는 탐방객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찻길과 나란히 걷는 길을 참 이쁘게 다듬어 두었다.



▼<08:20>더리미 마을 도착. 장어구이가 유명한지 입간판에 더리미장어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조그만 포구를 품고 있는 마을이다.




▼찻길 한켠으로 걷기도하고



▼방죽 위로 난 편안한 길도 나온다. 오늘은 왼쪽에 바닷길을 보면서 편안히 걷는 여정이 계속된다.



▼<08:34>도래미마을 앞은 지나는데, 섬 島 - 올 來 - 아름다울 美의 도래미로 다시오고 싶은 아름다운 섬이란 마을 명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08:44>용진진에 도착한다. 돈대를 관리하는 원형의 진지로 보인다.


『용진진은 숙종 42년에 설치되었다하며 3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 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진이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의 있었다고 한다. 이 진에서는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 돈대를 관리하였다.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문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하였다. 좌측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cm-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강화군청 홈피





▼까페인데 건물이 특이해서 한장 남기고


▼지금 밀물이라 바다에서 물이 올라오고 배는 거슬러 바다로 내려가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아침부터 진짜 덥고 땀 많이 흐른다.


▼<08:57>찻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간다.



▼탐방객들이 많지 않아 숲길은 거미들 사냥터가 되었다. 나무가지 하나 꺽어 앞을 헤치며 걸어간다.


▼<09:54>용당돈대 도착. 오는 돈대및 진지 여러 곳을 탐방하게된다.

『용당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중 하나로,가리산돈대,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다. 평면형태를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4개의 포좌가 설치되었으며 내부에는 건물지가 남아 있다.』 현지 안내 설명




▼돈대에서 내려와 다시 해안 방죽길로 들어 간다.



▼여기는 살구나무를 심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죽은 나무도 보이고 난장이 나무도 있다. 아직 덜 익은 열매가 제법 달려 있다.


▼타래붓꽃 자생지로 길이 나 있다. 꽃은 지고 열매로 익어가는 시기이다.



<09:29>화도돈대

『숙종5년(1697)에 강화도 해안 쌓은 여러 돈대 중 하나다. 해안 절벽쪽으로 장축을 기대고 있는 면의 길이가 35m이고, 다른 면은 32m로 한 면이 약간 짧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성벽의 석축은 대부분 파괴 되었으니 성벽의 뿌리는 어느정도 남아 있었다. 돈대의 남쪽 아래에는 고려외성을 가로 지르는 물길을 건너는 화도 수문(水門)이 있다. 2002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현지 안내 설명



▼돈대에서 내려오니 편의점이 보인다. 탁자에 잠시 앉아 쉬어간다.  할머니가 준 오이 정말 달았다. 잘 먹었읍니다


▼코스가 길어  A B C로 나누었네.


▼B 구간에 주말이면 장터가 열리나 보다. 아침부터 주막에는 아저씨들 앉아 한상 벌리고 있다.



▼갯벌 게들도 나들이 나왔구나!


▼한마리 잡혔는지 왁자지끌하다.


▼오두돈대 올라가는 입구


▼빗물에 흙이 다 쓸려 내려가고 계단 돌이 엉성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두돈대 도착. 복원이 잘 되어 있는  돈대로 강화해협 쪽으로 튀어 나와  자라 목처럼 생긴 지형에 자리 잡았다. 큰자라 - 鰲 머리 - 頭





▼강화외성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고추가 아주 실하게 많이 열렸다. 태풍이 올까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다는 할아버지! 사진 찍어준다고 아주 좋아 하신다. 할아버지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나들길에는 이렇게 만든 쉼터가 자주 나온다.


▼게들이 나들길 바닥에 구멍을 만들었다. 나를 발견했는지 잽싸게 도망가며 집게로 나를 위협한다.



▼강화도 해안에 자전거길도 잘 되어 있다. 아침부터 자전거 자주 보게된다. 가을에 친구들과 한바퀴 해볼까!


▼지나온 오두돈대가 있는 곳을 돌아보니 정말 자라머리처럼 강화해협으로 튀어 나왔네


▼나들길을 아름답게해주는 조형물이 갯벌에 전시되어 있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쉼터. 덥고 습기가 많은 날이라 자주 쉬게된다.



▼채송화가 꽃 피우는 계절이구나! 논뚝에 콩이 자라고 있고 벼는 튼튼하게 올라오고 있다.


▼이제 2-C 구간 시작이다. 여기는 광성마을



▼회전 교차로 중앙에 자리한 장군. 누구일까?


▼<10:39>광성보 매표소 도착.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인삼막걸리 한병은 가방에 넣었다.



『사적 제 227호이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을 쌓아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이를 고쳐 쌓았고 효종 9년(1658)에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가 완성되었다. 신미양요(1871)때 광성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다. 현재 광성보에는 어재연 등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 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다음백과


▼광성돈대





▼성문 밖으로 나와 바라본 강화해협


▼전투가 끝난 광성보에는 조용한 산책길이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다.



▼쌍충비

『쌍충비는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현지 안내 설명



▼쌍충비 바로 옆에 있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아래 안내판



▼신미양요 때 미국군들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손돌목 돈대



▼돈대에 올라 바라본 강화해협



▼손돌목 돈대에서의 전투 현장을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전사자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물살이 센 손돌목에 자리한 용두돈대. 용머리처럼 생겼다.








▼2004년 복원한 광성포대.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을 가장 먼저 받았고 최일선에서 막아야만 했던 그 때 그자리!


▼뒤돌아 보니 손돌목이 톡 튀어나와 물살이 세게 흐를것 같다. 그 위에 자리한 용두돈대


▼<11:46>걷는 사람도 없어 바윗길에 편히 앉아 막걸리 한잔하며 혼자 점심을 즐긴다.




▼<12:09>덕진진 도착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사적 제226호. 지정면적 15,018㎡. 현재 문루(門樓)·포대(砲臺)와 성곽·돈대(墩臺)가 남아 있다.병자호란 뒤 강화도의 방비책을 강구하여 내성(內城)·외성(外城)·진보·돈대 등을 축조하였는데 12진보는 그 중의 하나로 강화도 주위에 설치되었다.덕진진은 원래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의 계청(啓請)으로 첨사를 통진(通津)땅 덕포(德浦)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1677년(숙종 3) 유수 허질(許秩)의 계청에 따라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덕진진은 1679년에 축조된 용두(龍頭)·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南障)·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이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민족대백과 사전







▼덕진진에 속한 남장포대



▼포대 뒤 무궁화 한송이만 폈다


▼<12:22>덕진돈대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2)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할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위키백과



▼덕진돈대에서 바라 본 초지대교


▼덕진돈대에서 바라 본 손돌목


▼조금 전 지나 온 남장포대


▼잠시 아주 이쁜 길이 나온다.





▼초지대교가 가까이 보이니 이제 곧 초지진에 도착하겠네! 하늘이 많이 밝아졌다.


▼고구마 밭을 메고 있는 아낙도 힘들어 보이고


▼새우 양식장 펌프도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건너편은 자주 가 보았던 대명포구


▼가까이 갈 수 없어 무엇을 잡고 있는지 궁금하네!


▼<12:55>초지진 선착장 도착.





▼<13:03>초지진 도착

『사적 제 225호이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고, 군기고와 화약 창고 등 군사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타원형의 돈대에는 포좌 3개, 총좌 100여개, 실제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대포가 1문 전시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사전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초지진 주변 잠시 구경하고 8코스로 바로 들어간다. 더운 날이어도 그렇게 힘든 길이 아니니 계속 걷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