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구 부부와 남한산성 가는 날이었는데
새벽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려 산행은 취소되어었고,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비는 그치고 일기 예보를 보니 오전에 약간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하늘을 보니 비 올 징조는 아닌 것 같다.
둘이라도 가자하여 가방 챙겨 출발한다.
해가 없으니 상대적으로 선선함을 느껴 걷기에 좋은 날이 되리라 기대하며 남한산성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남한산성 남문주차장 → 남문 → 영춘정 → 서문 → 북문 → 장경사 → 송암정 → 동문 →남문 원점 회귀로 8.7Km를 휴식 시간 30분 포함 약 4시간 걸렸다.
사적 제57호. 둘레는 약 8,000m.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1688년(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다.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 네이버 사전
▼ 우리가 걸었던 길
▼ < 10 : 59 > 해가 없으니 걸을 수 있는 최고의 날씨인데 조망은 엉망이겠다. 산행 취소했다가 다시 나와, 남문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11시가 되었다. 친구하고 같이 온다고 산책길에 대해 사전 공부를 전혀하지 않아 급히 지도만 보고 출발한다.
▼ 누구 누구 不忘碑라 새겨진 비석이 많이 세워져 있다. 남한산성과 관련 공을 세운자들을 기리는 비석인가 보다.
▼ < 11 : 06 > 오늘 남한산성종주 출발지 남문에 도착한다.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남문,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 ☜ 현지 안내 설명서
▼ 성곽 밖에서 본 남문
▼ 남문에 올라와 종주 출발한다.
▼ 아름다운 성곽 라인이다. 이제부터 오르고 내려가고 성곽길 따라 걸어 보자.
▼ 해가 없어 무더위는 피할 수 있어 좋은데 조망은 '0'점이다. 성남시 은행동 부근인 듯.
▼ 걷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쌓아 올린 탑에서 잠시 쉬었다.
▼ 골프장이 보이고 한참 올라가고 있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인구는 줄어 들고 아파트는 엄청 세우고 있고~~~
▼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던 시절 이 나라 백성들! 돌 져 나른다고 고생 많이 했겠다.
▼ 뒤돌아 본 성곽
▼ < 11 : 32 > 봄을 맞이하는 정자인 영춘정(迎春亭)
▼ < 11 : 38 > 제6암문(서암문) 도착. 오늘 처음 본 암문이다.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성곽길 주위에는 오래 된 멋진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 수어장대 부근을 지나가는데 좀 올라가라고 이정표가 되어 있어 오늘은 그냥 통과한다.
▼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라 관리할 일도 많은 가 보다. 등로 정비를 위한 자재가 엄청나게 쌓여 있다.
▼ < 11 : 48 > 서문 도착. 인조가 47일간 항거하다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산성을 나갈 때 이문을 통해서 나갔다고 한다. 한강변 삼전도까지 가서 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항복을 표시했다.
▼ 이제는 잠실에 높은 빌딩도 올라가고 다시는 그런 치욕의 역사가 오지 않으리!
▼ 여기는 제5암문
▼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는 엄청난 인파. 내려가면 시멘트 포장길을 한참 걷게된다.
▼ < 12 : 05 > 북문 도착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도고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회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남문,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 현지 안내 설명서
▼ 북문을 지나니 탐방객들도 많이 없고 탁자가 있는 휴식 공간도 거의 없다. 배는 고프고 자리 찾아 한참을 걸어간다.
▼ 푸르름이 절정을 치닫고 있다.
▼ 좀 늦었다! 산딸기 다 따 먹었네
▼ 싸리나무 꽃도 지고 있다.
▼ < 12 : 21 > 겨우 찾은 자리. 탁자는 없고 벤치 위에 차렸다.
▼ < 12 : 44 > 먹고 마시고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둘러 정리하고 일어나 오후 걷기 시작이다.
▼ 제4암문 (북암문). 여기서 보니 통로라기 보다는 요즘의 방공호 같다.
▼ 먹고나니 된비알이 버티고 있다.
▼ 제3암문(봉암성 암문).
▼ 남한산성 여장(女墻)
『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 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塼乭)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 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에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 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 ☜ 현지 안내 설명서
▼ < 13 : 07 > 벌봉이 있고 남한산 정상이 있는 곳이라는데 오늘은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 남한산성 군포지(軍舖址).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로 125개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 그 터만 보존하고 있다.
▼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 암문)
▼ 툭 튀어 나간 장경사신지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 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하는데 남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남한산성에는 총 5곳에 옹성이 설치되었다. 성곽 전투에서의 최전방 같아 보인다.
▼ < 13 : 35 >장경사 도착.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
『 인조2년(1624년)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떄 승려 백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력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하였다. 축성 후 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년(1638년)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 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이 세워졌는데,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었는데, 그 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 ☜ 현지 안내 설명서
▼ 장경사 앞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둥근 성곽
▼ 제1암문(장경사 암문). 이제 동문을 찾아 간다.
▼ < 13 : 56 > 바위가 있고 소나무가 있는 곳이 송암정터로 보인다.
『 송암정은 우리말로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나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 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 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 』 현지 안내 설명서
▼ 많이 손상된 성곽
▼ < 14 : 02 > 동문 도착. 지금 동문은 해체 복원 작업중.찻길을 낸다고 성곽을 끊어 놓았던 것을 이어주는 복원공사인지???. 산행기에 보니 아스팔트 찻길을 따라 남문으로 직진한 경우도 있던데 우리는 다시 성곽으로 올라간다.
▼ 헤체하기 전 동문 (빌려온 사진)
▼ 동문을 지나 길을 건너면 수문이 보인다.
▼ 수문 바로 위에 가파른 성곽길 직전에 있는 제11암문(동암문). 남한산성 16개 암문 중 규모가 가장 큰 암문으로 동문에 계단이 있어 우마차가 다닐 수 없어 이 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암문은 시구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시신이 이문을 통해 버려져 천주교인의 성지순례장소이기도 하다.
▼ 이제 본격적인 된비알이다. 편한 길 걸을 때는 해가 없었는데 올라 갈려니 해가 쨍쨍이다.
▼ 15분 정도 물을 쪽 빼며 올라 왔다.
▼ 옹성에 있는 암문
▼ 오전에 시작했던 성곽이 보인다.
▼ < 14 : 49 > 남한산성 한 바퀴 돌아 도착한 남문. 도착 인증 사진 남기고 내려오며 칡즙도 한잔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무사히 끝났다. 겨울에 눈 많이 내린 날 한번 더 와야겠다.
▼ 모란 오일장이 그날(4/9일)이라 잠시 들러 구경하고 집에 오니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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